각화卻話, 각화榷貨, 각화당돌刻畵唐突, 각화도覺華島, 각화무염刻畵無鹽

각화[刻畫] 각화(刻畫)는 새기고 그린다는 뜻으로, 누추한 자질을 아름답게 꾸며 장식해 준다는 말이다. ()나라 유량(庾亮)이 주의(周顗)에게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악광(樂廣)에 견주고 있다.”라고 하니, 주의가 어떻게 무염(無鹽)을 화장시켜 서시(西施)의 앞에 내세운단 말인가?[何乃刻畫無鹽, 唐突西施也?]”라고 답했다는 각화무염(刻畫無鹽)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69 周顗列傳> 무염(無鹽)은 전국 시대 제 선왕(齊宣王)의 부인이 되어 나라를 크게 안정시킨 무염 고을의 추녀 종리춘(鍾離春)을 가리키고, 서시(西施)는 춘추 시대 월()나라의 대표 미녀이다.

각화[卻話] 한 단어로 봐서 회고(回顧)하다, 돌아보다로 풀기도 하고, 각각 독립된 말로 보아 을 부사 다시정도의 뜻으로, ‘말하다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 야우기북(夜雨寄北)돌아갈 날 묻는다만 기약을 할 수 있나, 파산의 밤비 소리 가을 못에 넘쳐나네. 어찌하면 함께 서창의 촛불똥을 자르면서, 문득 파산의 밤비 내리던 때를 얘기해 볼꼬.[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窓燭 卻話巴山夜雨時]”라고 한 데서 보인다.

각화[榷貨] 국가가 전매하는 것이다. ()나라 때 세수(稅收)를 증가시키기 위해 차·소금··철 등을 국가가 전매하여, 민간에서 팔 수 없게 한 것이다. 구양수(歐陽脩) 통진사상황제(通進司上皇帝)관아에서 곡식을 사서 국고에 들여도 아래에서 호응하는 자가 없어, 법을 바꾸어 국가가 전매하는 바람에 상인들이 다니지 않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4, 50만 명의 사람들이 오직 서쪽 지방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서쪽 지방 사람들이 어찌 곤궁해지지 않겠습니까.[至於鬻官入粟, 下無應者, 改法榷貨而商旅不行, 是四五十萬之人, 惟取足於西人而已. 西人何爲而不困.]”라고 하였다.

각화당돌[刻畵唐突] 추녀를 단장하여 미녀를 능가하려 한다는 뜻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견준다는 의미이다. ()나라 유량(庾亮)이 주의(周顗)에게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악광(樂廣)에 견주고 있다.”라고 하니, 주의가 어떻게 무염을 화장시켜서 서시의 앞에 내세운단 말인가.[何乃刻畫無鹽 唐突西施也]”라고 답변한 각화무염 당돌서시(刻畫無鹽 唐突西施)에서 유래한 말이다, 무염(無鹽)은 전국 시대 제 선왕(齊宣王)의 부인이 되어 나라를 크게 안정시킨 무염 고을의 추녀(醜女) 종리춘(鍾離春)을 가리키고, 서시(西施)는 춘추 시대 월()나라의 대표 미녀이다. <晉書 卷69 周顗列傳>

각화도[覺華島] 요령성(遼寧省) 흥성현(興城縣)에서 12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 이름으로,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뱃길로 조회하러 갈 적에 배에서 내린 곳이라고 한다. 후금이 요동을 점거하고 있던 1621년부터 1637년 사이에 조선은 해로(海路)를 통해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처음에는 배를 타고 등주(登州)까지 가서 그 다음부터 육로로 갔지만, 1629년에 경로를 바꿔 각화도(覺華島)로 간 뒤 육로로 갔다. 현재의 이름은 국화도(菊花島)이다.

각화무염[刻畵無鹽] 아무리 꾸며도 무염이란 뜻으로, 얼굴이 못생긴 여자(女子)가 아무리 화장(化粧)을 해도 미인(美人)과 비교(比較)할 바가 못 됨. 비교(比較)가 타당치 않거나 너무 차이가 나 비교가 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종리춘(鍾離春)은 제() 땅 무염(無鹽)의 딸로 선왕(宣王)의 정후(正后)인데 지극히 못생겼다.” 하였다. 진서(晉書) 69 주의열전(周顗列傳)()나라 유량(庾亮)이 주의(周顗)에게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악광(樂廣)에 견주고 있다.’라고 하니, 주의가 어떻게 무염을 화장시켜서 서시의 앞에 내세운단 말인가.[何乃刻畫無鹽 唐突西施也]’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무염은 매우 못생긴 여인을, 서시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쌍방의 사이에 현격한 수준의 차이가 있을 경우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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