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葭誼, 가의葭倚, 가의嫁衣, 가의假衣, 가의加意, 가의賈誼

가의[葭誼] 가의(葭誼)는 혼사(婚事)를 뜻한다. 먼 친척.

가의[葭倚] 억새풀이 기대었다. 삼국 시대 위()나라 명제(明帝)가 황후의 동생인 모증(毛曾)과 황문시랑(黃門侍郞) 하후현(夏侯玄)을 같은 자리에 앉게 하자, 하후현이 자신의 초라함을 매우 부끄러워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서 갈대가 옥수에 의지한 것과 같다.[蒹葭倚玉樹]”라고 하여, 보잘것없는 모증이 옥수 같은 하후현 옆에 앉았다고 표현하였는데, 후세에는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世說新語 容止> <三國志 卷9 魏書 夏侯玄傳>

가의[嫁衣] 여자의 혼례복이다.

가의[假衣] 임시로 만든 책표지이다.

가의[加意] 특별히 생각하다.

가의[賈誼] 가의(賈誼)는 서한(西漢) 초기의 저명한 정론가(政論家)이자 문학가로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의논문(議論文)에 뛰어났다. 낙양(洛陽) 사람이다. 18세에 군내(郡內)에 재명(才名)이 알려져 하남군수(河南郡守) 오공(吳公)의 막하에 들어갔다. 20여 세에 한 문제(漢文帝)의 부름을 박사(博士)가 되어 조의(朝議)에 참가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년이 안 되어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정삭(正朔)과 복색(服色)을 고치고 제도를 재정비하며 예악(禮樂)을 부흥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주발(周勃), 관영(灌嬰), 장상여(張相如), 풍경(馮敬) 등 대신(大臣)과 열후(列侯)의 배척을 받아 장사왕(長沙王) 오저(吳著)의 태부(太傅)로 폄적되었다. 이 때문에 가장사(賈長沙) 또는 가태부(賈太傅)라고도 칭한다. 3 뒤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양회왕(梁懷王) 유읍(劉揖)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양회왕이 낙마하여 죽자 이를 몹시 자책하다가 1년여 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과진론(過秦論), 논적저소(論積貯疏), 진정사소(陳政事疏) 등의 산문과 복조부(鵩鳥賦), 조굴원부(弔屈原賦) 등의 사부(辭賦)가 있고, 저서로는 신서(新書)와 가장사집(賈長沙集) 있다. <史記 卷84 賈生列傳><漢書 48 賈誼傳>

가의[賈誼] 서한(西漢: 전한前漢) 때 낙양(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으며, 20세에 문제(文帝)에게 발탁되어 최연소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되었다. ()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律令)과 관제(官制), 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前漢)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과 관영(灌嬰)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를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文帝)의 막내아들인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죄책감과 함께 이를 애도한 나머지 한 해 뒤 3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저서에 가장사집(賈長沙集)과 신서(新書) 10권이 있으며, 치안책(治安策)과 진()의 멸망 원인을 추구한 과진론(過秦論)은 가장 훌륭한 문장으로 칭송되며 널리 알려져 있다. 가태부(賈太傅) 또는 가장사(賈長沙), 가생(賈生)으로도 불린다. <史記 卷84 賈生列傳><漢書 賈誼傳>

가의[賈誼] 전한(前漢)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문학가로 낙양(洛陽: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사람이다. 가태부(賈太傅), 가생(賈生), 가장사(賈長沙) 등으로도 불린다. 18세에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외고 문장에 능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밝아 한 문제(漢文帝) 20여 세의 나이로 박사가 되고, 1년 만에 승진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가의가 정삭(正朔)을 개정하고 의복제도를 바꾸고 관명(官名)을 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키는 등 개혁을 역설한 치안책(治安策)을 올리자 문제가 이를 받아들여 법령을 개정하였다. 문제가 가의에게 공경(公卿)의 직임을 맡기려고 하자, 주발(周勃관영(灌嬰) 등 대신들이 가의를 질시하여 낙양의 연소한 초학자(初學者)로서 오로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모든 일을 분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문제가 이때부터 가의를 멀리하여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시켰다. 이때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굴원(屈原)과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다. 4년 뒤에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인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양회왕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자신이 직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애도한 나머지 1년 뒤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가의의 사부(詞賦)는 위로는 굴원과 송옥(宋玉)을 잇고, 아래로는 목승(牧乘)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시대를 여는 가교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서(新書) 10권과 정론문(政論文)으로 과진론(過秦論), 논적저소(論積貯疏), 치안책(治安策) 등을 남겼다. <史記 卷84 賈誼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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