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지적柯亭之笛, 가정채적柯亭蔡笛,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 가제력歌帝力, 가제이국치家齊而國治

가정지적[柯亭之笛] 가정(柯亭)의 피리. 가정은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품질 좋은 대나무가 생산되는 곳이라 한다. ()나라 복도(伏滔)가 지은 장적부(長笛賦)의 서문(序文) 처음에 채옹이 강남으로 피난하여 가정에서 자는데, 가정의 누관 건물에 대로 서까래를 얹었던바, 채옹이 그것을 쳐다보고는 좋은 대라고 말하고 그것을 취하여 젓대를 만들었는데, 뛰어난 소리가 유독 절묘하여 역대로 전해 와서 지금에 이르렀다.[初邕避難江南 宿于柯亭 柯亭之觀 以竹爲椽 邕仰而眄之曰 良竹也 取以爲笛 奇聲獨絶 歷代傳之 以至于今]”라고 하였다.

가정채적[柯亭蔡笛] 가정(柯亭)은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서남쪽에 있는 정자 이름인데, 후한(後漢) 때의 문인 채옹(蔡邕)이 일찍이 회계(會稽)로 피난을 가던 도중 가정에서 묵다가, 그 정자의 서까래로 얹은 대나무에서 뛰어난 소리가 날 것을 알고는 이것으로 젓대를 만들었더니, 천하의 보기(寶器)가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가정촌[柯亭村] 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가정리(佳亭里)이다. 조선조 전기 때는 진주목 동면 오곡리(吳谷里) 가정자(柯亭子)였다.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 가정(嘉靖)과 융경(隆慶)은 명()나라 세종(世宗)과 목종(穆宗)의 연호이며, 칠재자(七才子)란 그때에 활동했던 일곱 시인, 즉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 서중행(徐中行), 종신(宗臣), 사진(謝榛), 오국륜(吳國倫), 양유예(梁有譽)를 말한다. 이들의 시는 너무 의고(擬古)에 치우쳐 자구를 맞추는 데에만 전력하고 정신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정황제[嘉靖皇帝] 명나라의 황제. 사촌 동생으로 황제의 후계자가 되어 생부모를 추존하였다. 가정 황제는 명 세종(明世宗)이고, 정덕 황제는 명 무종(明武宗)이다. 명 세종(明世宗)8대 헌종(憲宗)4자 흥헌왕(興獻王)의 아들로서 헌종의 3자인 효종(孝宗)의 장자 무종(武宗)을 이어 즉위하였는데, 세종은 처음에 유조(遺詔)로 나를 황제의 자리를 잇게 한 것이지 황자(皇子)로 삼은 것은 아니다.”라 하고서, 마침내 흥헌왕을 황고(皇考)라 하고 효종을 황백고(皇伯考)라 호칭하였다. <명사明史 본기本紀 17>

가제력[歌帝力] 천하가 태평함을 뜻한다. ()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천하가 잘 다스려지는지와 백성들이 자기를 우러러 받들기를 원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 친히 미복 차림으로 강구에 나가서 살펴보았더니,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이 천자(天子)의 은덕을 입은 줄도 전혀 모른 나머지, 한 노인(老人)이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이른바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기를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서 쉬도다.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 갈아서 밥을 먹거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何有於我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가제이국치[家齊而國治] 대학장구(大學章句) 10장에 이른바 천하를 평안히 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매 백성들이 효를 흥기하며,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매 백성들이 공경함을 흥기하며, 윗사람이 고아를 구휼하매 백성들이 저버리지 않는다. 이러므로 군자는 혈구(絜矩)의 도가 있는 것이다.[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라고 한 데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이 세 가지는 윗사람이 행하면 아랫사람이 본받는 것이 그림자와 메아리보다도 빠르니, 이른바 집안이 가지런해지면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 마음이 똑같아서 한 지아비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함이 있게 해서는 안 됨을 볼 수 있다.[此三者 上行下效 捷於影響 所謂家齊而國治也 亦可以見人心之所同 而不可使有一夫之不獲矣]”라고 한 데서 보인다.

댓글